※ WARNING ※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의 후반부 반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2018년 7월 31일 작성글 백업본

ⓒ 고래, 밀차 2017 / D&C MEDIA

“술잔과 싸움은 받는 것이 예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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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주인공 중 한 명.

용감하지만 겁이 많고, 정의롭지만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며,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승부욕이 있어서 지는 걸 싫어하는 데다 말솜씨도 좋아 언쟁이나 기 싸움에 능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을 잘하기 때문에 져야 할 땐 기꺼이 지는, 적당히 현실적이면서 또 적당히 배려심 많은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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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 비비안, 시아트리히, 그리고 베아트리스에게도 말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는 레리아나이지만, 특히나 남주인 노아와 대화할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멕이는 장면 정말 좋다.

 “저 의심하는 거 아니었어요? 제가 저 모임에 들어가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도 괜찮냐는 뜻이에요.”

 “그럴 수 있다면야. 그리고 난,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자는 주의거든.”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노아에게 쿵쿵거리며 다가갔다. 코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레리아나가 고개를 바짝 들고 말했다.


 “이거 저한테 빚지는 거예요. 그리고 아주 비싼 빚일 거예요. 전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자는 주의거든요.”


/ 연재본 13화, 단행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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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말 잘하는 능수능란 포커페이스 캐릭터 같은데 그건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 대외적인 사교계용 미소를 지을 줄은 알지만 의외로 포커페이스에 강한 타입은 아님. 오히려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

크게 웃고, 인상을 찌푸리고,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리며 불만을 표시하고. 미안할 땐 미안한 표정, 곤란할 땐 곤란한 표정, 숨기는 게 있을 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다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그런 점이 꽤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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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표현을 많이 하는 캐릭터인데도 레리아나의 이성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계획적이면서도 방어적인 인물이기 때문인 듯. 강을 건너기 위해 무작정 강물에 뛰어들기보단 돌다리를 찾고, 그 돌다리도 몇 번씩이나 두드려 보는 부류.

생각이 많다. 하긴 애초에 생각이 많지 않았으면 초반에 범인에게 당해 죽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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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 이 과정이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레리아나가 노아를 거래 상대로 낙점하게 된 데에는, 거래 상대로서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선택지가 노아 밖에 없어서였을 거다. 조건을 따져보면,

  1. 브룩스 후작가보다 세력이 큰 가문이어야 한다.
  2.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만날 수 있어야 한다.
  3. 상대가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일단 (1)에 해당하는 가문은 체이머스 왕가, 윈나이트 공작가, 블레이크 공작가 이 셋. 이외 다른 공작가는 작중 언급된 일이 없고, 후작가는 애매하다.

그리고 (2)에서 윈나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문이 제외된다. 체이머스 왕가 사람이라곤 시아트리히 한 명 밖에 없는데, 당시 시아트리히는 낙마 사고로 인해 진통제 맞고 해롱대고 있었으니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블레이크 공작도 그 시기에는 ‘문제의 수양딸’을 만나기 전이라 친자식을 잃은 아픔에 변방에 처박혀있어서 만날 방법이 없고, 결국 남은 건 당장 있을 무도회에 참석하는 노아 윈나이트 공작 한 명.

천만다행히도 노아는 ‘원작’의 남자주인공이었기 때문에ㅋㅋ 레리아나는 그에 대해 아는 정보가 꽤 많아서 조건 (3)까지 무사히 충족. 거기다 노아의 인성(?)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약점을 빌미로 거래할 생각을 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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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약혼을 빙자한 [6개월 간의 신변 보호 요청]을 한 것인데.

레리아나 입장에선 브룩스와 파혼할 핑곗거리 + 파혼 후 브룩스 가의 보복으로부터 일정 기간 맥밀런 가를 지켜줄 권력 쉴-드가 필요했던 거라, 놀랍게도 알아서 대형 사고 친 프렌치 브룩스가 유죄 확정 땅땅 받고 감옥 간 순간 사실은 감옥 문턱 밟기도 전에 노아가 죽였지만 바로 계약 기간을 줄이려고 시도함.

아직 식도 올리기 전이니 약혼이 공식문서화(?)도 안됐겠다, 그러니까 파혼남 파혼녀 꼬리표도 안 붙겠다,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기엔 납치 당하고 살해 협박도 당하고 벼랑 끝에서 떨어지고 다소 스펙터클하긴 했지만 아무튼.

 “저, 노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알아. 이제까지 날 좋을 대로 써먹고 이제 와서 필요 없어지니 버리겠다는 거잖아.” 

 “왜 그렇게까지 매정한 여자처럼 표현하고 그러세요.” 

 “맞잖아.” 

 “……맞아요.” 


/ 연재본 22화, 단행본 1권

그럼 이때 레리아나가 노아에게 전혀 사감이 없어서 이렇게까지 매정한 이성적인 판단을 했는가 하면, 절대 아니겠지.

며칠 전 일어났던 납치 사건에서 그녀를 구하러 달려온 노아의 품에 안겼을 때. 그리고 함께 말을 타고 티격태격하다 어렵사리 그에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전했을 때. 레리아나는 노아와의 관계가 이제 전과 같을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이별 통보 계약 종료 제안은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거리를 두려는 방어기제의 발현.

 “그래도 곧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걸요.”


 노아가 글쎄, 하며 말을 줄였다.


 “두고 보세요. 게일 가문 일도 제가 맞았잖아요.”


/ 연재본 22화, 단행본 1권

레리아나는 정말 징그럽도록 현실적이고, 방어적이고, 상황 파악을 잘 해서. 이미 웬만한 일들은 모두 ‘그 책’에 적혀 있던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버둥 친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웬만한 몸부림으로는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

이 세계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곧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라고 노아에게 하는 이 말은 명백한 선 긋기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말같이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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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아가 아직은 안 된다며 유야무야 넘어가니, 레리아나도 같이 유야무야 넘어가 주었다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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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어적인 성격은 어디 안 가서 노아의 감정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던 레리아나는 금세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챔 → 오 X발 큰일 났다 너 설마 나 좋아하냐 직구로 확인 사살 때려 놓고 상대가 답하기도 전에 어, 니 맘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말하지 마라, 우리 그냥 여기서 끝내자 안녕히 계세요 해버림.

그렇게 공작님은 열렬하게 키스까지 했던 썸녀에게 잔인하게 차였다

다행히 똑똑하신 공작님은 이 거대한 철벽의 이성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해봤자 소용 없다는 걸 잘 아셔서 ‘계약 기간은 6개월로 한다’ 라는 조항을 근거로 들고나옴.

무작정 사랑한다고 제 감정을 밀어 붙이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우리 관계는 뭐였냐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노아가 예쁜 얼굴로 처연한 표정 지으며 들고나온 것이 하필이면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았다’ 라는 명명백백한 팩트였기에, 이성을 앞세워 감정을 버리고 도망치던 레리아나조차도 그 팩트를 핑계 삼아 조금 더 노아 곁에 남아 있자 결심할 수 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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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주며 꼬신다고 해서 레리아나가 다 넘어가는 건 아님.

저스틴과의 반지 에피소드만 보아도, 집안의 광산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가격의 약혼반지를 돌려 받기 위해서, 라는 핑계로 저스틴과 식사 한번 할 법도 한데. 애초에 협박을 한 저스틴의 잘못이 크니까 마음의 부담과 책임을 전가하기도 쉽고.

그러나 레리아나는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는다. 속으론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태연한 얼굴로 거절하며 젠장 정 안되면 광산을 팔아야지, 부모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하는 의리갑 레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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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분명한 태도 차이를 보이는 건 결국 레리아나가 노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레리아나 본인도 계약 기간은 그럴듯한 핑계일 뿐, 노아 옆에 계속 머무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노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휘둘리게 되는 건, 결국 좋아하기 때문일까.


/ 연재본 59화, 단행본 2권

자신이 노아를 좋아하는 것도, 노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모두 아는데. 문제는 노아에게 정해진 운명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베아트리스라는 것. 

차라리 노아가 아니라 레리아나 본인에게 다른 운명의 상대가 있는 거였다면 그녀는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 두말 않고 노아를 선택했겠지. 운명은 본인이 개척하기 나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레리아나 본인 아닌가.

그러나 이건 레리아나가 아닌 ‘노아의 운명’이다. 노아의 마음이 변한다면, 그리고 노아에게 그 운명을 거부할 마음이 없다면 레리아나 입장에선 손 쓸 도리가 없다. 이걸 단순히 노아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뭐한 게, 세상은 레리아나가 억지로 바꾼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곤 모두 본래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원래 죽었어야 할 레리아나가 살아남자, 마치 이 세계 전체가 레리아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의 위기가 닥치는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해진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레리아나는 노아와 베아트리스가 어떻게 만나는지, 언제 어디서 사랑에 빠지는지, 노아의 눈에 베아트리스가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일지까지 아주 세세히도 아는 상태다.

그 모든 걸 알고도 노아를 택할 만큼 레리아나는 무던하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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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치 있는 독자들이라면 초반부, 끝방 거울 에피소드에서 이미 반전의 실마리를 얻었을 건데

 레리아나의 눈동자 색은 녹색이었다. 그러나 방금 거울 속에 비쳤던 것은 분명,


 ‘……파란 눈동자.’


/ 연재본 39화, 단행본 2권

그렇다. 노아의 운명의 상대가 본인 되십니다, 레리아나 양.

연재 당시 귀신 들린(?) 거울에 레리아나의 녹색 눈이 아닌, 정황상 200%의 확률로 베아트리스일 것이 분명한 파란 눈동자가 비친 이 장면을 두고 댓글 창에서 웅성웅성 댔는데. 이것을 검은 신녀 및 주술 떡밥과 연결해 베아트리스가 이 거울을 통해 레리아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재미있는 해석도 있었으나, ‘거울’이라는 물건의 본질과 거기에 흔히 따라 나오는 클리셰를 생각하면 답은 분명했다.

결국 중요한 건 육체도 이름도 아닌 ‘영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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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영혼 문제였냐? 이거 결국 처음부터 타고나야 된다는 거 아니냐? 그런 소설이었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습니다, 이것은 될놈될 안될놈안될 소설이라고 자신 있게 답하겠습니다.

돌고 돌아 ‘원작 남주인공’과 ‘원작 여주인공’이 이루어지는 조연 빙의물…의 탈을 쓴 환생물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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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힌트는 많았다. 39화의 거울 떡밥은 그야말로 대놓고 주는 힌트였고. 본문의 선상 데이트 씬 - 시계탑에서 이름을 부르는 장면의 오버랩 등은 정황상 ‘원작의 베아트리스 = 현재의 레리아나’ 라는 뉘앙스를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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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작가님이 어디까지 의도하신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작중 ‘원작의 베아트리스’를 묘사하는데 유독 반복되고 겹치는 표현이 그녀의 성격과 웃음에 관한 묘사.

  • 허리께에서 굽이치는 눈부신 금발. 사랑스럽게 미소 짓는 아름다운 베아트리스 (23화)
  • 활기차고 생기 있던 예전의 베아트리스 (97화)
  •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생기 있는 웃음 (97화)
  • 네 밝은 성격과 아름다운 미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발에 채이도록 많아지겠지 (102화)

왕국의 보석이라는 비비안 샤말을 제외하면 베아트리스는 설정상 거의 작중 최고의 절세미인인데, 그녀의 외모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금발 벽안이라는 것 외에 별달리 등장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나오는 ‘활달한 성격’과 ‘생기 있는 웃음’이라는 표현은 외모보단 그녀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것들인데, 여기서 연상되는 캐릭터는 단 한 명 밖에 없음.

 밤은 더 깊어졌다.


 히이카와 레리아나는 계단형 무대 맨 앞에 앉아 유랑 극단의 공연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노아는 그와 떨어진 가로수에 기대 팔짱을 끼고 레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극단의 배우가 비틀거리며 가짜 칼을 휘두르니 레리아나가 몸을 뒤로 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또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귀여워.’


 노아는 무심코 든 생각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입을 매만졌다. (중략) 한 번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는 제멋대로 튀는 생각이나 마음을 주체하기가 힘들어 곤란했다.


/ 연재본 56화, 단행본 2권

 강렬한 첫인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작고 부드럽게 웃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귀한 가문의 여식답지 않게, 정말 즐거운 듯 커다랗게 웃는 모습은 절로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 연재본 42화, 단행본 2권

작중 이런 분위기로 이렇게 웃는다고 묘사되는 사람은 레리아나 맥밀런 한 사람 밖에 없다. 

너야, 너라고. 감정 표현 풍부한 레리아나 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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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동시에 운명을 거스르는 용기도 원하는, 로맨스 독자들의 이율배반적인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영리한 서사.

그렇다면 이 ‘운명과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한 ‘원작의 레리아나 맥밀런 씨’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건 단상 0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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